나의 스승 백오 이해선(1)_안장헌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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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2-11-15 11:49 조회219회 댓글0건본문
나의 스승 백오 이해선
한국사진의 영원한 빛
안장헌 / 사진가.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자문
시각적 기록매체인 사진을 예술적 표현도구로 확장시키는 데 상당한 노력과 역할을 한 분이 백오 이해선 선생이다.
1950년,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춘곡 고희동 선생의 추천으로 서화협회 회원으로 가입·활동하면서 사진예술 연구에도 열정을 기울여 사진작업도 병행하였다.
“1936년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를, 1939년에는 백양사우회를 조직하여 후진들을 지도하는 한편, 사진을 통한 일제에의 저항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광복 후에도 위 두 클럽의 중견회원들을 중심으로 전국 규모의 단체인 조선사진예술연구회(현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창립하여 계속 후진들을 지도·육성하는 등 사진의 예술풍토 조성에 열과 성의를 다하였다.”(박필호 선생의 축사중에서)
백오 선생은 여명기 한국 사진예술의 길을 개척하고 넓혀 오면서 수많은 장애를 극복해야 했다. 그 중에서도 선생이 몸담았던 서양 화단의 반대와 질시를 가장 견디기 힘들어 하였다. 사진을 예술의 범주에 포함시키려는 시도조차도 달가워하지 않았던 시절에 서양화가가 사진가로 전향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화단은 선생을 애써 무시하려 하였고, 동경미술학교 선후배는 물론 동기들로부터도 따돌림을 당해야 했다.
또한 선생은 직업사진가의 길이 아닌 순수 아마추어리즘을 주장하였다. 사진작품이 상업화랑에서 전시되거나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더구나 선생은 작품을 상품으로 내놓기를 바라지 않았기에 경제적인 곤란을 감내해야만 했다.
내가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1967년 말,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연구 월례회에서였다. 대한 사진동아리를 같이 만들고 활동하던 친구가 「제16회 대한사협전」 (1967.11.)에 사진을 출품하게 되어 전시 작품을 보고 난 직후였다. 연구 월례회에서는 30여 명이 모여 준비해 온 사진들을 벽에 붙여 놓고 선생의 품평을 들었다. 좋은 평을 듣는 작품도 있었고, 주제에 대한 해석과 표현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짚어 주며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도 하였다. 허름한 중국집 2층에서의 모임이었으나 그곳에는 열정과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나는 회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끝날 무렵에 준비해 간 10여 점의 8×10프린트를 따로 보아 주셨다. 대체로 내용은 좋으나 표현이 서툴다 하였으나 고향집 근처에서 찍은 녹두덩굴 사진은 “선의 구성이 잘되었다”며 칭찬을 해주셨다. 그 후 한 달여 뒤에 열린 「종합미술전시회」(1968.1)에 ‘선(Line)’이란 화제를 붙여 출품하게 되면서 나도 대한사협의 연구회원이 되어 선생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선생을 만나기 훨씬 전부터 세계적인 사진가들의 작품집과 사진서적을 통하여 사진사조의 흐름과 사진의 사회적 역할에 대하여, 또 사진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심해 왔기 때문에 선생의 지도방법에 다소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선생은 초지일관 “시각언어로서 사진의 표현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조형문법을 습득하고, 대상(피사체)과의 교감을 통하여 내면의 이미지를 강조하고 돋보이게 구성하는 방법”을 찾아보도록 독려하였다. 선생의 이런 교육방법은 중·고교 시절 입시준비로 제대로 미술수업을 받지 못한 나에게 미적 감흥과 감각, 디자인 능력을 함양시켜 보려는 선생의 처방이었을 것이다. 내 속에 잠재된 조형 역량을 키워주려는 선생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생의 생전에 선생을 꽤나 귀찮게 하는 제자였다. 내가 선생에게서 조형 훈련을 받지 못했다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작업을 할 수 있었을까? 문화유산 속 상징성과 미적 감흥을 표출해내는 나의 작업은 선생으로부터 받은 기초 훈련 덕분이다.
선생이 운명하시기 3일 전 병실을 찾았을 때, “선생님, 빨리 일어나셔서 다시 호통을 쳐 주셔야지요”하니 싱겁게 웃으시며 “또 사진 던진다고 덤벼들려고…”하신다. 선생께서는 성의 없이 찍어온 사진은 용서하지 않았다. 육십 대의 제자가 가져온 사진이라도 생각 없이 쉽게 찍어 온 사진은 집어던지며 호통을 치곤 하셨다. 작품을 대하는 안이한 태도를 경계하였기 때문이다.
선생은 선생의 첫 사진집 서문에서도 “사진예술이란 미디어의 특성으로 보아 사실적인 표현이어야 하되, 그것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감성적 해석으로 재창조함으로써 예술적인 승화를 꾀하여야 한다.”는 선생의 신조를 밝혔듯이, 촬영대상, 즉 주제에 대한 작가의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예리한 관찰을 강조하곤 하였다. 주제로부터 받은 느낌을 내속에서 완전히 용해시켜 내면의 감흥을 토해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작품으로 승화될 수 있다.
선생의 고집스런 예술관은 선생께서 살아온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을사늑약으로 나라의 주권을 잃어 가던 1905년, 선생은 서울 가회동에서 이달용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의 할아버지 흥완군은 흥선대원군의 동생이다. 조선 왕조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과는 6촌간이며, 고종황제는 당숙이 된다. 요즘 말로 로열 패밀리다.
또한 충정공 민영환의 따님과 결혼하여 민영환의 공의 사위가 된다. 그러나 선생의 성장기는 나라를 빼앗긴, 그것도 몰락한 왕족의 삶을 살아야 했다. 선생이 그림을 그린 것도 조그마한 자유라도 얻어내려는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동경유학 시절, 새로 등장한 사생도구인 카메라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부터 선생의 사진인생도 시작된 셈이다.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면서 전공인 유화작업을 계속한다. 남아있는 유화작품을 보면 주로 정물과 누드를 즐겨 그린 것 같다. 인물화는 미술학교 졸업 전에 전시한 자화상을 볼 수 있다. 학생 때의 모습에서도 고집스러운 면모를 드러낸다.
1932년, 당시 창경원에 있던 이왕가박물관에서 한국 고미술품 관리위원을 맡게 되고, 1934년, 덕수궁 석조전에 새로 들어선 이왕가 덕수궁미술관에서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쇠락해 가는 궁궐(선생은 보통 ‘대궐’이라 하셨다)의 건물과 석물들을 촬영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찍어 놓은 귀중한 원판들을 6·25전쟁 때 피란을 떠나지 못하여, 인민군의 요구대로 원판을 넘겨줄 수 없어 모두 불태워 버려야 했던 쓰라림은 선생의 초기 작품을 볼 수 없는 한국사진사의 큰 손실이기도 하다.
1936년에는 현일영, 박영진, 임병기, 이규완, 이성윤 등과 뜻을 보아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를 창설하였다. 이는 일본인들의 독무대였던 사진계에 한국인들만의 사진단체를 조직하여 아마추어 사진인을 지도·육성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또한 백오 선생이 사진 예술의 길로 매진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선생이 사진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조국이 광복을 맞으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1945년 9월, 전국 규모의 중견 사진가들을 규합하여 조선사진예술연구회를 발족한다. 지금의 대한사진예술가협회의 전신이다. 백오 이해선 선생의 사진예술에 쏟는 정열과 애정이 깊어질수록 전국의 사진가들이 모여들게 되었고, 각 지역에 지부를 설치하여 명실 공히 전국적인 사진단체로 성장하였다. 정부는 1961년 5·16쿠데타로 모든 예술단체를 해체시켰다. 이에 1962년 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를 새로 발족해 그 산하에 한국사진협회를 창립하여 사진단체를 하나로 묶었다. 1964년, 문화단체 활동 해금령이 내려지자 백오 선생이 앞장서서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다시 일으키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오 이해선과 대한 사협은 하나의 등식으로 불릴 만큼 선생의 공헌이 크다.
선생은 나라 잃은 왕가의 후손으로, 억압받는 관리대상으로 성장기를 보냈으나 일제가 그에게 던져 준 남작 칭호를 거부함으로써 광복 이후 선생의 활동은 비교적 자유로웠다. 영친왕의 귀국 후, 이방자 여사가 낙선재에 머물 때 선생은 왕실의 일원으로 문안을 하곤 하였는데, 하루는 내가 선생을 따라 낙선재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슬픈 역사의 주인공들의 만남을 보면서 선생이 지고 가는 무거운 짐을 보게 되었고, 왜 그렇게 살아야 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될 듯하였다.
선생의 삶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왕손으로 큰 혜택을 누리고 왕손이기에 대접을 받고, 사진계도 선생을 윗자리에 모셔 온 것으로 이야기하곤 한다. 그러나 16년 동안 선생의 노년을 모임에서, 가끔은 안국동 자택에서 지켜보면서 흐트러짐 없이 꼿꼿하게 버티시는 한 예술가의 눈물겨운 고통과 고독을 보았을 뿐이다.
선생이 사진예술의 길을 열어 주어 후배들은 요즘 덜 고단한 길을 가고 있으나, 선생이 화필을 던지지 않았더라도 저리 고생하며 푸대접을 받았을까 하는 데 생각이 미치면 선생의 가시밭길에 아무 힘도 되지 못한 안타까움이 남는다.
선생은 평소 커피와 담배를 무척 즐기셨다. 주머니가 가벼운 제자들은 명절에 인사드리러 가더라도 담배 한 보루나 커피 한 병 사들고 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선생은 손수 버너에 불을 피워 주전자의 물을 끓인 후 머그잔에 커피를 가득 채워 주시곤 하였다. 선생을 생각할 때면 그 커피 맛이 그리워지고, 함께 마시며 사진 이야기를 나눌 때의 그 흐뭇한 표정이 떠오르곤 한다.
선생은 골초는 아니었으나 하루 반 갑, 어떤 날은 한 갑을 다 피우기도 하였다. 건강을 위해 금연을 권유하면 일흔 넘게 살았는데 조금 더 살자고 즐거움을 버리고 싶지는 않다고 하신다. 결국 폐암으로 78세로 우리 곁을 떠나셨다.
선생은 수석과 분재에도 관심이 많았다. 수석을 즐기는 동호인들과 탐석에 동행하여 직접 수집해 오시기도 하였다. 선생의 심미안을 잘 아는 동호인들이 수집해 온 돌들을 선생에게 보여드리며 선별을 청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수집품 중에서 아끼는 수석을 제자들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선생의 수제자인 안준천 교수는 여러 점을 물려받았고, 나에게도 선생의 손때가 뭍은 산소선을 집들이 선물로 주시기도 하였다. 선생의 분재사랑도 남달랐다. 선생의 첫 번째 착품집 첫머리부터 불발기창으로 스며든 빛에 분재 둘을 배치하여 멋진 조화를 이룬 작품을 찍어내었듯이, 선생은 분재를 피사체로 즐겨 촬영하였다. 자택의 조그마한 앞마당에는 선생이 애지중지 하는 분재들이 늘 가지런히 놓여 햇빛을 쬐고 있었다.
선생은 평생 흑백사진만을 고집하였다. 초기 컬러 사진의 발색이 유화물감처럼 자유롭게 색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겠으나 “흑백사진은 사물이 지닌 모든 고유색을 흑백만의 추상세계로 바꾸어 놓으며, 농담의 계조, 빛과 그림자가 연출하는 뉘앙스에 각별한 매력을 느낀다.”는 선생의 선택이기도 했다. 1970년대 후반에 새로운 감광유제의 개발로 컬러 발색의 폭이 넓어지고, 색온도 변환 필터와 색보정 필터의 적용으로 원하는 색상을 얻을 수 있다고 컬러사진을 찍어 보실 것을 권유해 보았으나, “자네는 열심히 연구해 보라”며 웃으시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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