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오 이해선 선생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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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2-11-01 12:32 조회281회 댓글0건본문
1920년대 후반 이후 한국사진사의 첫 장을 장식하던 인물인 현일영, 서순삼, 김광배, 박필호 등과 함께
‘사진계 5老’중의 한명이었던 李海善(이해선.1912~83), 사진계의 몇몇 인사를 제외하고는
기억하는 이가 많지 않은 이름이지만 선생은 ‘초기 예술사진 개척자’로서 지울 수 없는 사진사적 위상을 갖고 있다.
기록매체인 사진을 예술적 표현의 도구로 초기 한국사진예술에 많은 업적을 남기셨다.
원래 일본 도쿄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으나 사진이 갖는 사실의 표현성에 심취돼
사진으로 돌아서 살롱적 아취가 풍기는 작품을 상당수 남겼다.
이해선선생은 조선조 영친왕의 재당숙. 즉 영친왕은 그의 7촌 조카이다.
선생은 1905년 이달용의 장남으로 서울 가회동에서 태어나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를 1930년 졸업하였으며,
미술학교를 졸업 한 후 귀국하여 국내 서양화가 제1호로 기록되는 춘곡 고희동선생의 추천으로 회화협회 멤버가 되었으며,
20대 나이의 이해선선생은 1932년 李왕가박물관(창경궁 소재)의 한국고미술품관리위원,
1934년 李왕가 덕수박물관(석조전 소재)운영위원등을 역임하였다.
당시 선생은 그림과 사진 작업을 병행하였으며, 李왕가 박물관과 덕수박물관에서 일하면서
고궁의 미술품과 건축 조경을 비롯해 생활풍물을 렌즈에 담기 시작하였으며,
‘李왕가의 후손’이라는 후광에 힘입어 일찌감치 당시 사진단체의 리더로 활동하였다.
1935년 ‘한국인 중심의 첫 사진단체’인 현일영선생과 함께 만든
경성아마추어카메라클럽의 지도위원을 거쳐 회장, 고문을 역임했으며, 1939년에는 백양사우회 지도위원을 지냈다.
광복 후 1945년에는 조선사진예술연구회(현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창립하여
회장과 고문을 거치며 후진을 양성하는 등 사진의 예술풍토의 조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61년 5.16군사혁명으로 모든 예술단체가 해체된 후 정부의 주도로 1962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가
발족하여 산하에 현 ‘한국사진작가협회’의 창립에 참여하시고, 1964년 문화단체의 활동 금지가 해제되자 선생께서는
다시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일으키시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후 1974년 11월 고희기념으로 선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인 ‘향토풍물 50경’을 주제로 한
‘이해선 사진작품전’이 대한사진예술가 주최, 한국사진작가협회 후원으로 열렸다.
1980년에는 문화재관리국에서 한국의 궁궐건축에 대한 선생의 작품으로 ‘한국의 고궁’ 출판하였으며,
‘한국의 고궁’은 문화재보호협회에서 추가 인쇄를 거듭하여 조선 궁궐건축 연구와 복원에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이 후 선생께서는 그간의 작품을 정리하여 ‘백오 이해선 작품집’을 발간하시고
1983년에 78세의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운명하신 후 선생의 사진에 대한 뜻을 기리기 위하여 ‘대한사진예술가협회’에서는
유족들이 기부한 조위금과 뜻있는 분들의 후원으로 매년 한국 사진 발전에 공이 있는 사진가를 선정하여
‘백오 이해선사진문화상’을 수여하고 있으며,
역대 이해선 사진문화상 수상자로는 유동호, 황규태, 윤주영, 최민식, 강상규, 이순흥, 송기엽, 최흥만, 김한용,
안장헌, 조세현, 안희탁, 마이클 케나, 구와바라 시세이, 김완기 등이 있다.
이해선作 曲城(곡성) 195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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